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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소개 > 지명유래

궁류면 벽계마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3197
등록일
2003.08.11
읍면
궁류면
첨부

면소재지(토곡)에서 시오리쯤 되는 심산유곡 마을이다. 옛날에는 평촌(坪村), 운계(雲溪)와 함께 합천 궁소면이었으나 1914년 우리고을에 편입된 지역이다. 평촌마을 바로 위에 몇집 있는「오호땀」과 벽계저수지 때문에 없어진「정동(正洞)」마을 사람들이 이주 해 살고 있는「배애골」몇 집도 벽계마을에 포함된다. 이곳 사람들은 편의상「웃벽계」와 「아랫벽계」로 부르지만 뜸으로는 셋이다. 「오호땀」은 옛날 궁소면 소재지였다고 하며 풍수설에 다섯집 이상은 살 수 없는 터라는 말 때문인지 몰라도 여태껏 다섯집 이상은 살지 않아서 오호(五戶)가 소지명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정동마을이 있었는데 벽계저수지 때문에 수몰되면서 이주하고 마을이름마저 없어져 버렸다. 물건너 산자락에「경주김씨정동세거유허비(慶州金氏正洞世居遺墟碑)」가 서 있다. 조금 위 길게 내리뻗은 「빼쪽산(빽산)」끝자락에 없던 동네가 새로 생겼다. 정동마을 사람들 중 골밖으로 떠나지 못한 다섯 집 일곱 세대가 정착한 「배애골」새동네인 것이다. 옛날 백로가 떼지어 살았던 골이라서 백학동(白鶴洞)인데 변음돼서 「배애골」로 부르게 된 것이다. 벽계 못을 가로질러 긴 다리를 건너면 가파른 산길인데 한참 올라가면 산중턱 양달에 오목한 마을「웃벽계」에 닿는다.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 노인층은「벽언이」또는 「벽기」라 부르는데 한자표기나 어원은 알 수 없다. 벽언이 동네 앞에 산줄기 두 개가 있다. 동쪽이 한우산(寒雨山)인데「찰비산」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서쪽이 산성산(山城山)인데 보통 산성터니 성터라고 부른다. 이 두 산맥 사이 칠마장 정도의 계곡이 바로 「찰비골」이다. 한우동(寒雨洞)으로 적는다. 오뉴월 한더위에도 이 산, 이 골에서 맞는 비는 겨울비처럼 차갑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또 산성산은 가야와 삼국시대 때 외침을 대비한 산성이 있었고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이웃 합천군 문화유적소개에도 「주위 약 2km의 석축(石築)성지로 성내에는 다시 두루 2백m의 토축성(土築城) 두 군데가 남아 있으나 붕괴되었으며 왜병이 침입 때는 봉수대(烽燧臺)로 이용했다」고 기록이 있다. 또 마을 뒷산이 꾀꼬리봉인데 꼭대기에 있는 큰덤을 「망바구」니「망덤」이라 부르는데 이는「망(望)을 보는 바위」란 뜻이며 거기서면 사방의 몇 십리는 볼 수 있다고 한다. 마을 들머리 높이 솟은 산은 함박꽃 모양이라서 함박산이며 뒷산은 버들잎이 돋아 날때면 꾀꼬리가 둥지를 틀고 많이 살아서 황려봉이다. 동네 어귀의 밭언덕을「부추방」또는「부치방」이 있다. 그 옆에 「왕다실」「왕대실」「망다실」이란 들이름이 있는데 한자로 왕대곡(王大谷), 왕다실(王多失), 왕대실(王待室) 등으로 쓴다. 소(沼)에 살던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에 받혀서 골이 생겼다고 「용농굼티(굼턱)」도 있고 그 골의 약수는 알려진 물인데「집너매새미」즉 마을밖에 있는 우물이란 뜻이다. 마을을 지나서 서녘에 조상들의 신심이 서린 당산나무와 조산이 있어「조산껄」이라 한다. 거기서 찰비골로 접어드는 길목이지만 벌써 시원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아득한 옛날 이 마을에 살던 백정(白丁)의 딸이 신분을 속이고 재너머 이진사(□進士)댁 도련님과 혼인을 했는데 시집가던 그 날로 속인 일이 들통나고 파혼으로 쫓겨오게 되었다. 이 계곡따라 신부행차가 오게되는데 화가 난 백정은 딸이고 가마고 모두 물 속에 밀어 넣고 난 뒤 자기도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 순간 뇌성번개가 치고 억수비가 쏟아지고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말았다. 재너머 진사댁은 터도 없이 되었고 찰비골에는 없었던 바위돌이며 소(沼)가 여러 곳에 생겨났다. 신부가 빠진 자리가「각시소」, 농(□)과 가마(駕馬)를 던진 곳이「농소」와 「가매소」,「중신아비」와 백정이 죽은 곳이 「장개소」가 된 것이라고 한다. 찰비골 막마침은 가례와 대의로 통하는 「쇠목재」고 산성산 너머가 합천땅(쌍백)이다. 약 4백년전에 경주 김(金)씨가 먼저 터 잡았고 지금도 서른집 넘게 살아 대성이다. 달성 서씨 서너집, 경주 최(崔)씨 한집, 김해 허(許)씨 한집 등 세 땀을 통틀어 서른 여덟집이 살고 있다. 마을 바로 옆에 증승정원좌승지김녕김성배공(贈承政院左承旨金寧金聖培公)의 묘가 있고 벽산재(壁山齋)도 김씨종실이다. 저아래「배애골」에 현산재(峴山齋), 청금정(聽琴亭)은 김씨문중의 재실이다.
궁류면 마을 중 역사는 오래되었는데 일찍 없어진 마을인데 일찍 없어진 동네가 바로 벽계리 정동마을이다. 벽계저수지가 조성되면서 수몰지역이 되어 버렸고 살던 사람들은 「배애골」「평촌」등 이웃마을로 옮겨 앉거나 멀리 이주했다고 한다. 동네 앞산이 삐죽하다고 빼족산 또는 빽산이라 불렀고 배애골산은 찰비산 찰비골로 이어진다. 옛 마을안에 양지땀 음달땀 그리고 「이지니터」라 부르는 지역으로 갈려 있었다고 한다. 양지와 음지땀은 흔한 예이고 다만「이지니터」가 재미있는 지명이다. 이 마을 지명의 어원과 유래는 알 수 없고 댓집이 살고 있었다는데 옛날 몇 대를 이어 오면서 경주 김씨 집안 하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동네 앞에는 욕탕처럼 길쭉하게 생긴 바위 웅덩이가 있었는데 어른이 들어가서 누우면 꼭 알맞을 정도였고 메기나 뱀쟁이(장어)가 많았던 쏘가 있었는데 이름이「홈통」이라고 한다. 물을 대기 위해 만든 홈 같기도 하지만 항시 물이 고여 있는 물통과 같다는 설명이다. 앞산 꼭대기에 가면 신선이 놀다가곤 하는 신선바우(바구, 덤)도 있고 옛날에는 몇 집 없었던 점대꺼리란 곳은 이주하는 분들이 몇 집 들어앉게 되었다고 한다. 궁류 정동은 50여호가 살았던 김촌이었다고 한다. 벽계저수지 중간쯤에 대밭이 남아 있고 감나무가 물 속에 잠겨 있는 그곳이 마을터였다고 한다. 정동마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면서 동네가 바로 보이는 길가에 「경주김씨정동세장유허비(慶州金氏正洞世庄遺墟碑)」를 세워 놓고 있으며 유서 깊은 청금정(聽琴亭)과 현산재(峴山齋) 등 경주 김씨문중의 재실이 잘 보존되고 있다. 특히 청금정(관리인 김동기씨) 곳간에는 옛날에 썼던 여러 가지 귀중한 유물과 생활도구가 많았는데 1993년 개관한 군립박물관 민속자료실에 전시자료로 기증해 주어서 전시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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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 궁류면 총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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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01-18